교육

[대학비사]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①

YOROKOBI 2008. 4. 10. 19:14

[대학비사]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①
“2代 理事長, 설립자 배신하고 靑丘를 청와대에 넘겨”

올해는 정부수립 60주년의 해다. 정부수립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한국 대학사회의 역사도 이 정부수립과 함께 공식화 된다고 볼 수 있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문의 요람과 인재 양성의 터전이 된 한국 대학의 역사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값진 성과를 축적해 왔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장 이면에는 교육 報國의 기치를 내세우면서 私學을 건립, 인재 양성에 주력해 온 사학 주체의 노력이 실로 지대하다. 그러나 이들의 建學은 왜곡되거나, 망실된 경우도 적잖아, 이의 온전한 회복이 필요한 때다. 교수신문은 정부수립 60주년의 해를 맞아, 한국 대학의 설립 역사를 증언하는 기획의 일환으로, ‘靑丘大學’ 秘史를 싣는다.  


청구대학은 1948년 대구에서 설립된 사립대학이다. 당시 경북 청년총연맹위원장이었던 崔海淸 씨는 독립의 길은 배움에 있다고 생각해, 1948년 1월부터 대중강좌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돼, 40여명의 인사들이 뜻을 모아 대구 야간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張仁煥 씨를 회장으로 선임한 뒤, 9월 대구문리과 전문학원으로 인가를 받고 법학과, 문학과, 이과, 180명의 학생을 모집, 같은 해 11월 임시교사에서 개교했다. 초대원장에 崔海淸 씨가 취임하고, 이사장으로 鄭宗壽 씨를 모셨다.  


1949년 3월 포정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4월에 ‘청구대학’으로 교명을 개편, 1953년 3월에 제1회 졸업생을 輩出, ‘54년에 제2대 이사장으로 全基守씨를 임명, ‘55년 8월에 문화동 신축 교사로 입주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대학의 위용을 갖추었다. 1961년 대학원을 설치한 데 이어 1962년에 병설 실업초급대학, 1963년 병설 공업고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64년에는 대학본부를 30여만 평의 효목동 교사로 이전했다. 1967년까지 총 14회 3,45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1967년 12월 大邱大學과 통합되면서 영남대학교(학교법인 영남학원)로 개편되었다.  


‘청구대학’은 과연 자의로 ‘영남대학교’로 거듭났는가? 교수신문은 올바른 대학사의 정리와 이해 차원에서 과거 역사의 망실된 틈을 재조명하기 위해 최해청 씨의 차남 崔瓚植(80) 씨의 기고를 실어, 사학 ‘설립자 측’의 증언을 기록하고자 한다. 
 
※ 격동기의 대학 설립과 관련된 세밀한 역사를 회고, 증언해주실 분은 교수신문 편집국(editor@kyosu.net)으로 제보해주기 바랍니다.

 

그동안 긴 세월을 嶺南大의 “어둠과 거짓 물리치려고” (校歌에서 - 鷺山 李殷相 작사) 어지간히도 애써왔건만 매양 메아리 없는 광야의 외침이오, 울리지 않는, 찢어진 신문고였다. 요즘에 와서 조금은 변동이 있는 것 같으니, 이것이 다 민중의 진실과 정의를 渴望하는 피어린 노력의 덕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봄은 언제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지, 여러 모로 未備하고 不滿한 점도 많다. 그래도 지금은 국가 차원에서 ‘過去事’를 들먹이고 나섰다. 이게 어디냐. 오래 기다리던 甘雨의 첫방울을 맞은 기쁨을 形容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진실’에 잇달아 숨가쁘게 ‘화해’를 내세워야하고, 과거사의 糾明과 事必歸正을 강조하기도 이전에 ‘정리’를 말해야하는 데서 이 긴 간판이 탄생하기까지의 정치적 産苦를 엿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교수신문>에서 귀한 지면을 割愛해 이 글을 싣게 된 것도 可謂 단비의 첫 방울이다. ‘密雲不雨’라 하더니, 하늘 한 구석을 쑤셔 작은 비나마 내리게 해 준 것이다. 나는 지금 그 고마운 비에 붓을 적셔 이 걸 쓰고 있다. 


[註: 이 원고는 지난 7월에 이렇게 시작했다. 해가 바뀌고 지금에 와서는 위에 언급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자체에도 이런 저런 딱지가 붙어 흔들리는 상태다. 요지경 같이 도는 세태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사 정리 자체가 어느 정권의 정치적 ‘제스처’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매기는 것은 방금 등장한 정권을 위해서도 利로운 발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害가 되는 말이 아닐까 염려된다. 과거 역사에 壁을 쳐발라버리는 정권이라면 그 정권의 冒瀆이 됐으면 됐지, 자랑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바로세우기는 그 동안 오랜 국민운동의 결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든다면, 가스 냄새가 거리를 덮던 그 과거의 망령이 또 되살아난다. ‘정권이란 배는 百姓이란 물위에 떠 있는 물건이다’라는 말은 古來의 격언이지, 지금 운동가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다. 그래서 上段에서 언급한 약간의 아나키즘을 그냥 두기로 했다. 훗날에 이것은 2007~2008年 사이의 政界變化를 증언하는 생생한 증거가 될 것이고, 지금 당장으로는 變하는 중에도 변치 않는 역사의 바른 흐름이 지켜지기를 기대하는 念願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작년 7月 당시 매스컴에 반영된 바 영남대 事態에 겨누어 쓴 것이다. 독자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는지, 그 후의 구성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작년에  <교수신문>은 ‘密雲不雨’ 란 社會寸評을 내놓아 都下의 각 신문에서 인용을 하더니, 올해는 ‘自欺欺人’이란 成語를 게시했다. “남을 속이는 것은 自身을 속이는 데서 비롯된다.” 무서운 말이다. 개인을 위한 座右銘이 될 뿐 아니라, 막 들어 선 정권이 자기감시를 하는 잣대로도 적격이라 생각한다.  


이글을 게재하기 직전에 이 나라는 崇禮門을 燒失당하는 통곡할 손실을 입고, TV 에서는 연일 국민적 반성의 토론이 벌어졌다. 그 중에는 防災에는 물질보다는 사회적 시스템 상 요인이 중요하다는 말도 들렸다. 나도 往年의 金大中 대통령 앞으로 보낸 陳情書(다음 어느 回에서 등장할 예정)에서 이 나라의 ‘事故 共和國’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에 언급했다. 구조상 원인에는 꼭 사고의 결과가 따른다고 단언하면서, 물리적 구조 못지않게 사회적 구조의 결함이 내포하는 후탈에 대해 경고했었다. 마침 작년은 설립자 也靑 先生 서거 30주년이더니, 올해는 靑丘大學이 始源을 둔 1948년부터 60주년에 해당한다. 晩時之歎과 恨. 그러나 事必歸正이랬다. 그 첫 門을 열어 준 <교수신문>의 勇斷을 다시금 치하한다.] 


2007年 7月, 영남대를 둘러싼 얽히고 설킨 상황은 이랬다. 첫째 청구대학의 前 理事長 全씨의 아들은 빈번히 매스컴을 타며, 주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씨를 상대로 그가 영남大 이사직에 있을 때의 운영비리를 문책했다. (舊)대구대학의 대표 설립자의 長孫 역시 朴후보의 학교자산 관리상의 비리를 공개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영남대학은 여전히 ‘校主 박정희’를 定款 제1조에 모시고 있다. 작년 교육부에서는 임시이사회에 학교 정상化 방안을 제시하라는 公文을 示達했는데, 신문보도에 의하면 이사회는 여전히 과거 靑丘, (舊)大邱 兩大學의 설립자 측은 묵살한 채, 학교를 장차 어떻게 요리하느냐에만 鳩首會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 동안 오랜 세월을 내가 청구대학 설립자를 代辯해 呼訴해온 데 대해서는 아직도 시종일관 한 마디 반응도 없다. …… 이 상태는 2008년 3월 현재,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바깥으로 불거진 일련의 事緣들을 청구대학 설립者 也靑의 입장으로 보면 이렇다. 청구대학의 前 理事長 全씨의 遺族은 학교를 청와대에 갖다 바친 대가로 약속받은 褒賞金을 아직도 못 받아, 지금 그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일단 수긍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以上 청구대학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느 다른 학교의 경우와는 달리 全씨를 제2대 理事長으로 앉힌 것은 설립자 也靑 先生이었음에도, 그는 설립자를 배신해 그에게는 일언반구 상의 없이 학교를 청와대로 넘겼기 때문이다. 進上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褒賞을 받을 자격은 있을는지 몰라도 그 밖에 또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舊)대구대학은 우여곡절 끝에 財閥 이병철씨의 손에 있을 때에, 그의 ‘不得已’한 事情으로 進上을 해야만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를 계승할 때 元來 設立者團中 筆頭이셨던 崔 浚 선생의 학교의 장래에 관한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상의없이 그랬다고 하니, 그의 長孫 역시 통합과정에 있어서의 권력의 남용을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기부한 조상전래의 땅을 임의로 매각한 데 분노하고 있다. (舊)대구대학은 그러나 처음부터 여러 地主들(日帝下 中樞院 參議를 포함)이 자금을 모아 세워졌고, 주도하는 사람이 여러 번 갈린 데 반해, 적수공권으로 始終 한 사람의 CEO가 이끌어 온 청구대학과는 범주를 달리한다. (舊)대구대학이라 (舊)자를 달아야 하는 이유도 도중에 다른 학교가 ‘大邱大學’이란 이름을 襲用해, 지금은 그 학교와 구별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966년 12월 신축 校舍 붕괴 … 위기 몰린 신경영진, 惡手 던져”

 

영남대는 1988年 당시 文公委員會의 국정감사 후 박근혜씨는 이사직에서 물러가고, 교육부에서 임시이사會의 派遣을 받게 됐으나, 定款에 ‘校主 朴正熙’는 아직도 고수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창학정신’을 운운하고 있으니, 어떻게 이런 연결이 가능한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를 일으킨 용맹한 사나이“ 라면 몰라도 어디서 느닷없이 ‘창학정신’이냐 말이다. 이것도 사회의 어느 ‘엘리트’의 머리에서 나온 말이 아니겠느냐 싶으니, 더욱 한심하다. 이 나라에서 국정감사의 결론은 도대체 어떤 효력을 지니는지, 안 지니는지? 이 감사에서 그 학교의 성립과정의 비리가 여지없이 폭로되고, 換骨奪胎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말이다. ‘校主 朴正熙’는 2005년 다시 국회에서 白元宇 의원이 문제제기를 했으나  일과성으로 지나간 모양이다. 그러나 영남대에 몸담은 소위 ‘지성인’이 이것을 개의치 않는다면, 국회의원들의 鈍感을 탓해서 무엇하랴.
그 동안 영남대를 구성하는 집단은 하나의 폐쇄된 작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 학교의 현역들이나 동창회에서는 그 전신인 靑丘, 大邱(舊)는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였다고 한다. 박정희가 新設한 학교임을 믿고 싶은 나머지, 국정감사에서 호되게 그 정체성이 叱咤당한 것 쯤 馬耳東風으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명색이 대학이라고 차려놓고 있으니, 역사란 것도 좀 자랑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세월의 깊이를 말이다. 그래서 느닷없이 ‘역사자료’를 수집한다고 옛날을 기념할 수 있는 사진, 물품, 증서 등이 있으면 가지고 와 달라고 신문에 기사로 내기도 했다. 좀 인색하나마 여기서는 “옛 대구, 청구 자료도 환영” 한다고 한다(조선일보 2001.11.21). 역사적 자료를 말한다면 설립자 집안을 외면하고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緣木求魚를 하고 있다. 이것도  그 학교의 모순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2006년 4월 교육부 사립대학지원과는 영남대를 (무슨 理由인지) “임시이사 선임사유가 解消” 된 학교로 선포하고, ‘학원정상화’를 위한 방안을 제출할 것을 임시이사회에 시달했다. “학내 구성원, 상당한 재산 出捐者 및 학교발전에 기여한 者등, 이해관계인의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收斂(수렴)한, 현실성 있는 합의안을 마련하여 추진하시되, 이로 인하여 학내문제가 다시 야기되는 일이 없도록” 당부했다. “상당한 재산 출연자 및 학교발전에 기여한 자”를 말하면서 학교의 始原인 ‘설립자’에는 언급이 없으니 공문 작성상 이런 실수가 어디 있느냐 싶다. 학교란 재력으로만 성립될 수 있는 물건인가? 쏟아 부은 정신과 노력은 교육의 안중에는 없는 것인지? 굳이 재산을 말한다면, 설립자는 赤手空拳으로 시작했으나 18年 육성 끝에 靑丘大學의 자산을 당시 20억은 축적했노라고 자부했다. 여하튼 선의로 해석한다면, ‘학교발전에 기여한 자’와 ‘이해관계인’을 말할 때는 ‘학교를 창설한 자’로서의 ‘이해관계인’은 말 할 여지도 없이 포함된다고 看做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영남대는 이 示達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설립자 측은 깡그리 무시하고 드니, 그 상식의 정도를 의심한다.  설령 무시하고 싶었더라도 이래서야 ‘현실성 있는’, ‘이로 인하여 학내문제가 다시 惹起되는 일이’ 없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까 싶으니 말이다. 설립자에게는 傍若無人으로, 장차 학교를 어떤 식으로 요리하느냐를 검토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신문에 떠들고 있으니, 감히 말하건대, 이것이 大盜의 심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설립자측으로 봐서는 대통령에게 빼앗겼거나, 임시이사회에 빼앗기거나 아무런 다름이 없다.  이걸 ‘社會還元’이라 한다면, 학교 자체가 원래 사회사업이지 무엇이었던가? 한심하고 가소로운 것은  학교가 처음 발족할 때는 태어나지도 아니했던, 나이 어려 東西 분간을 못했던 사람들이 까마득한 선배 어른들이 心血을 쏟아부은 업적을 맘대로 요리하고자하는 이 현상이다.  


2002년에 박씨 遺族이 거금을 들고 와서 다시 대학을 점령할 욕심을 보였을 때, 당시 임시이사회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5년에 영남대는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함으로써 “한 시대와 과거의 어두운 유산을 정리하는 의미가 있다”고 喧傳했다(每日新聞 2005.9.27.) ‘박정희 校主’를 確信하는 자세다. 그리고 한 시대와 과거의 어두운 유산은 박씨와 김씨 사이의 개인적 화해로 끝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영남대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정치성을 띄어도 되는 것일까? 그 정치성의 내용의 蒙昧함은 또 다른 얘기다. 누가 옳고 그른 시비는 고사하고, 그 동안 암담했던 사회적 갈등과 피로 얼룩진 투쟁의 역사가 어디 어느 두 개인의 반목으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였더냐 말이다. 이런 무지와 愚昧가 지성의 전당을 지배하는 정신이니, 이것은 些少한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 오래 오래 기다렸던 단 비의 첫방울을 맞는 기쁨을 말했다. 50년 전 6.25 때 희생된 骸骨을 이제야 파헤치고 鎭魂祭祀라도 치러 줄 수 있게 됐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다. 그 동안 기나 긴 겨울 공화국에서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혹자는 그런 얼어붙은  세월도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필요악이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경제학을 믿지 않는다 - 경제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여하튼 여기까지라도 싸워 나온 우리 정신의 승리를 치하하는데 인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잔치를 벌릴만 한 快勝은 아니니, 일전에 본 신문에서 어떤 이는 ‘잘못된 힘의 역학관계’를 말하고 있었다. “민족반역자든 反民主의 범죄자든 스스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거꾸로 용서와 화해, 相生을 먼저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잘못된 역학관계라는 것이다. 억지 春香을 기대하고, 업드려 절 받기를 바라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우스운 꼴이다.  하물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타협이라는 쉬운 길을 택함으로써” 용서를 구하기보다 “용서하기가 더 쉬운 逆說의 땅이 되고 말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홍세화, ‘윤한봉 형, 그는 갔다’, 한겨레, 2007.7.11).


지난 해 박근혜 씨는 故 張俊河 선생 유족을 찾아가 謝罪를 했다. 과연 발은 옳은 방향으로 돌렸다 하겠다. 遺子는 이걸 받아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未亡人 金 여사는  이것이 “정치적 목적에 따른 거짓 謝過가 아니라, 진정한 애국애족의 苦悶에서 나온”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하겠다는 말로 맞이했다니, 말은 바로 했다(한겨레, 2007.7.12). 진정 박씨도 여기에 한 마음이라면, 앞으로 巡訪하여 사죄를 할 데는 줄을 이어 서 있다. 만약 이것을 실천한다면, 비로소 ‘逆說의 땅’을 ‘順說’의 땅으로 바꾸는 행위일 뿐 아니라, 이것이야 말로 亡父에 대한 진정한 孝道라 할 것이다.

어찌하여 靑丘大學은 靑瓦臺로 갔나?
1967년 6월 15일까지 靑丘大學 存續 여부의 문제는 있지도 안 했다. 1966년 12월 30일 교내의 말하자면 ‘茶잔 속 폭풍’과도 같은 突發 사건으로 1967년 들어 설립자는 蟄居하고 있었으나, 新運營陣은 ‘名譽學長’으로 모시는 자세로, 諮問에 응해 줄 것만 懇請하는 반면, 설립자는 화를 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上記한 날 正午 新築中인 校舍가 붕괴하여 사상자가 나고 신문, 방송으로 널리 보도되고부터 판국이 달라졌다. 去年末 설립자 也靑先生의 주도하에 3층 설계로 착공하다가 중단된 것을 新陣營은 경제 이유로 6층으로 올리려 한 것이다. 也靑은 황급히 병원을 찾아 피해자를 위문하고 학교에 달려가 新陣營과 선후책을 논의할 요량이었는데 그들에게 외면을 당한다. 지금 건축물 설계문제로 司法 조사를 받게 돼 있는데, 원래설계가 6층이라고 우겨야 할 마당에 설립자의 출현은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옹졸함도 可歎이거니와, 설립자의 憤痛이 어떠했을지도 상상할 수 있다.


많은 사상자에 대한 보상, 끔찍한 사법문제와 사회에 대한 책임,  숙제로 남은 재정문제, 거기다 아마 설립자에 대한 미해결의 인간적, 도의적 문제를 싸잡아 뜨거운 감자를 靑瓦臺로 넘김으로써 해결책으로 여긴 모양이다. 여기서 청구대학 문제는 대통령 박씨 이전에 이 나라 소위 지식人들의 道義問題에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까지 설립자의 곁에서 일 있을 때마다 우정어린 輔弼을 해 오던 鷺山 李殷相씨가 오늘은 청와대에 들어가 “‘大統領을 百年 할 수 없는데, 그만 두면 빗자루 들고 돌아 설 생각은 해 보았는가? 會社社長이 될 수 없고, 외국에서는 대학총장을 하는 일을 많이 보는데, 가장 떳떳한 일 같은데’로 시작하여 그 능란한 말솜씨로” 進上을 裝飾한 것이다(嶺南大學校五十年史, 嶺大出版部, 1966, p 195).
1967년 6월 29일자로 된 理事들의 進上 覺書에는 기이하게도 이사장 자리는 비어있다(前揭 嶺南大學校五十年史 p.7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