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청산된 불교 친일파 VS 청산되지 못한 기독교 친일파

YOROKOBI 2008. 10. 1. 18:52
청산된 불교 친일파 VS 청산되지 못한 기독교 친일파 

 

장로교에서 일제에 헌납한 비행기 '조선장로호',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감리교에서 헌납한 비행기도 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비행기 헌납 문제로 감리교에서 횡령의혹이 발생되어 난리가 일어 났다고 한다.

 (일제에 전투기를 그냥 바친 것이 아니라, 일부는 횡령? 대단한 인간들....)

 

요즘 즐보드 게시판에 일제시대 때 불교가 전투기를 헌납 했다며, 똑 같은 글을 계속 반복적으로 도배하는 놈이 있습니다. 예, 상당수의 불교도 일제때 친일로 돌아섰죠.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은, 스님들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도록 강요했죠. 자세히는 모르지만, 스님들이 결혼하는 것은 일본식 불교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불교와 기독교(개신교)의 친일청산은 이뤄졌을까요?  이제부터 그 사실을 살펴봅시다.


● 이승만에 의해 청산된 친일파 불교?
일제의 대처승 정책의 영향으로, 해방후 비구승은 200명 남짓 이었고, 대처승은 7000명 이상이었다. 그때, 교회 장로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깡패들을 파견해 불교를 평정했다. 무려 10년간의 정화운동 끝에 왜색승인 대처승들을 절에서 쫓아내게 되는 것이다.


말이 좋아서 사찰정화지.... 그야말로 깡패들을 보내 중들을 두둘겨 패놓는 비 민주적인 일이 자행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사찰을 정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왜 불교만 정화 했는지 의문이다. 같은 시기의 개신교에서도 친일파와 고려파(신사참배 거부파)의 싸움이 있었는데, 이승만은 개신교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든 간에, 비구승 200명 VS 대처승 7000명 의 관계가 역전된다. 왜색 승려였던 대처승들이 대부분의 사찰에서 쫒겨났고, 비구승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대처승들은 태고종단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태고종 마저도 비구승이 40%를 차지 한다고 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불교계는 친애하는(?) 이승만 각하께서 깨끗이 청소해주셨다. -_-;;


● 친일파가 득세한 개신교
일제시대 당시, 모든 개신교가 일제에 협력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YMCA, 혁신교단..... 대부분이 신사참배를 했다. 기독교(개신교)의 친일행적은 여러분들도 다들 알고 계실 것이니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다만, 이 글의 논쟁점은 친일청산 문제이니 만큼, 해방후에 친일파가 정죄 되었느냐를 따져 보도록 하자.

 

* 신사참배를 거부로 감옥에 감금 되었던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이기선 목사와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1945년 11월 14일 평북노회 주최로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5가지 사항을 발표했다.
①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②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간 통회 자복할 것.
③ 목사나 장로가 휴직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④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⑤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 할 것.

 

그러자, 신사참배 결의때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등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홍택기 목사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궤변을 토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여 분열되기 시작했다.


*감리교 역시 부흥파와 재건파(친일파)로 분열되었다. 1947년 1월 11일 연합회의에서 감독을 의장으로 고치고 강태희 목사가 의장이 되었다. 친일파가 감리사로 출세하게 된 것이다.


친일파가 감리교의 의장이 되자,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1947년 2월 3일 홍현설, 변홍규 목사와 문창모, 박현숙 등 평신도 56명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내용은 "교권을 잡은 재건파가 교회 장정을 유린하고 불법적 방법으로 연합을 가로막고 친일파를 두호하고 있다. 특히 친일교역자 19명은 감리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성서 모독죄: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배척하였고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을 거부하려 하였고

                     김진철 학생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를 읽었다고 출교시켰다.
② 신사참배 찬양죄: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가정에 가미나다를 설치케하고 상동교회를 신사로 만들고

                           교역자들을 미소기바라에 참여케하였다.
③ 재산매매 비리죄: 감리교 37개의 교회건물과 31개의 목사관을 매각처분하였고, 공주 영명학교 농지 18,360평

                            과 은퇴교역자를 위한 땅도 매각처분한 돈 40만원 중 절반은 일본군을 위하여 비행기

                      헌납금으로 하였고 나머지는 총리원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은퇴

                           교역자 농지매각은 1945년 9월에 하였다. 사용처를 밝혀라.
④ 배신 교역자: 친미적인 교역자 40여명을 해직 강등 자격취소를 하였고 그리고 일본 정부당국과 야합하여

                      그들을 투옥, 고문하게 하였다.

 

*교단을 해체했던 성결교회는 1945년 11월 9일 10일 교단명칭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라고 변경하고 재건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에서는 일제의 징병제를 찬양하고 교단의 해산 성명서에 서명한 박현명 목사가 총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 하거나 친일파를 규탄하는 일이 없어 교단이 분열되지는 않았다.
 
*1946년 7월 9일 경남노회는 제47회 정기노회에서는 출옥 성도 주남선 목사가 회장이 되었고, 친일파 임원진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이에 친일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할 것이며 지금 해방이 되었다 해서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 라고 되받아 치면서,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웃지 못할 논쟁이 시작되었다.

 

* 신사참배 거부파는 1946년 9월 2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7년 제48회 경남노회에서는 친일 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고, 학생추천 취소 결의를 했다.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는 메첸파 선교사와 신앙노선 갈등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자, 그 기회를 틈타 친일 교역자들은 1948년 7월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맹렬히 공격했다. 결국,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 49회 임시노회에서 44대 21로 고려신학교 설립 인정을 취소했다. 1948년 5월 총회에서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했다.


*6.25전쟁 중인 1951년 5월 24일, 나라의 국운이 흔들거리는 와중에 장로교 36회 총회가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파가 정죄 되었다. 결국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파는 1952년 4월 29일 제37회 총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장로교 고신이 되었다.

 

*1959년 9월 24일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 예수교장로회 44회 총회에서는 대규모의 패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1959년 9월 29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장로교 통합측이 분열 되었고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에 추대했다. (이후, 장로교는 끊임없이 분열했다.)

 

*비슷한 시기에 성결교회는 친일파 이명직 목사를 서울신대 학장으로 추대했다.


일제시대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개신교인은 극소수다. 문제는 고려파로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거부파는 교단에서 퇴출 당했다는 점이다. 현재, 그들은 장로교 고신으로 남아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장로교 고신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교단은 어떻게 되었나? 친일파가 교권을 잡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신교의 친일파는 정죄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한가?  왜색 승려들은 이승만에 의해 깨끗히 청소되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참조: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8377§ion=section12

 

대처승과 비구승의 싸움은 위의 링크에서 좀더 자세한 내용을 볼수 있습니다. 저 사이트의 올려진 글 중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59)-불교계의 친일타파 ]라는 부분을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듯 합니다.

 

위에 링크된 사이트 에서는 해방당시 비구승은 40명, 대처승은 7000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른 사이트의 자료들에서는 비구승은 200명, 대처승은 7000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글에서 비구승+대처승+이승만을 검색하면 비구승 200명 대처승 7000명이라는 사이트가 다수 검색 됩니다.)

 

아마도 해방 당시에 비구승이 전국적으로 200명 정도 인게 맞을 겁니다. 저 사이트에서 말하는 40명의 비구승은 극렬하게 안티-대처승 운동을 했던 스님들의 숫자인듯 합니다. 아무튼 해방당시, 대처승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지요. 어쨋든 이승만에 의해 일본식 대처승은 한순간에 몰락 해버립니다.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개신교의 친일문제를 그대로 놔둔것과는 전혀 딴판이죠....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