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나는 왜 아직도 헌금을 하는가?

YOROKOBI 2008. 10. 8. 09:47
나는 왜 아직도 헌금을 하는가?

우리는 십일조, 주정헌금, 월정헌금, 감사헌금, 건축헌금 등 다양한 제목으로 교회의 재정을 위해 헌금을 한다. 감사헌금의 경우 출생, 입학, 생일, 취직, 결혼, 주택구입 등의 제목으로 삶의 모든 순간마다 헌금을 드린다. 그 외에 1,000 일 동안 일정액을 매일 헌금하는 일천번제 헌금도 있고, 심지어 희망하는 수입을 정해서 미리 십일조를 내기도 한다.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각 헌금의 종류에 따른 명단을 주보에 발표해서 누가 무슨 헌금을 하는지 모든 교인들에게 알리고 금액을 밝히는 곳도 있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 교리공부와 함께 다양한 헌금생활에 대해 배우고,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끊임없이 강조된다. 교회에서 관리하는 헌금자료는 모든 직분 심사에서 빠짐없이 고려된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아름답고 귀한 일이다.
또한 나의 수입의 일부를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일은 깊은 믿음의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에서 늘 헌금생활을 강조하고, 그 명단과 금액을 서로 알게 하며, 헌금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비는 행위는 즉, 우리들에게 잘못된 동기로 헌금을 하도록 만들 위험이 크다.

(1)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오로지 헌금으로만 해야 하고,

(2)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더 크게 물질의 복을 주시며,

(3) 헌금액수가 바로 믿음의 분량이고,

(4) 교회에서 헌금의 사용과 집행에 대한 잘못은 하나님께서 할 일이니

(5) 교인들은 열심히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문제의 중심에 십일조가 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들 중의 하나인 ‘자급자족의 원칙’에 영향을 받아 시작된 십일조는 한국 개신교의 급성장을 이룬 중요한 배경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단계를 지나서 이제 십일조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되었고 그에 관한 논쟁은 금기시되어 있다.

십일조는 교인들이 복 받는 최고의 비결로 목회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가르쳐야

할 중심주제가 되었고, 반면에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행위로서 큰 재앙이 따른다고 동시에 가르친다. 십일조를 장려하기 위해 복 받은 증거로 수많은 신화들이 유포되는데 주로 미국과 한국의 여러 부유한 사업가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또한 십일조는 반드시 출석교회에 내야지 선교나 구제의 목적으로라도 다른 곳에 임의로 쓰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마음대로 하는 또 다른 죄가 된다고 설교한다.

하지만 이러한 십일조에 관한 모든 내용들은
결코 바른 성경해석과 적용이 아니며, 우리의 믿음과 헌금생활을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인 것처럼 인식시키고, 동시에 하나님을 오로지 돈만 밝히는 탐욕스러운 수전노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일조는 하나님으로부터 수십 배의 보상이 약속된 최고의 투자가 되었고,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도 미리 선불로 내면서 십일조의 열 배의 수입을 기대하는 도박으로까지 변질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십일조는 한국교회의 복이 아니라 재앙이며, 예수의 복음이 더 이상 무당의 굿거리가 되지 않도록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청산대상이 되었다.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는 창세기 14장에서 살렘 왕 멜기세덱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부분과, 창세기 28장에서 아브람의 손자 야곱이 형 에서의 추격을 피해 삼촌 집으로 도망가다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꿈에 보고 난 후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고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면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부분이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언급은 주로 십일조를 제사의 직분을 맡은 레위인들에게 주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말라기에서 십일조를 도적질함으로써 저주를 받은 것과 온전한 십일조를 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받는 이야기는 분명한 십일조의 증거본문 (Proof-text) 이다.

우선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 싸움에서 뺏은 것 중에서 주었으며, 그 후에 전혀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회성의 사건(평생에 단 한번 그것도 전리품의 십일조)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더구나 야곱은 단지 서원만 했을 뿐 실제로 십일조를 드렸는지 그의 삶의 행적으로 보아 매우 의심스럽다. 모세의 십계명에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레위기 27장에서는 십일조를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십일조를 레위 자손들에게 주라는 말씀은 민수기 18장에 들어있다.

어쨌든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확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들에게 주게 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분배 받고 농사를 짓게 된 후의 상황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십일조는 개인적인 감사와 헌신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신 원칙으로 바뀐다.

하지만 십일조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신명기 12, 14, 26장에 나와있다. 이 부분은 십일조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반면, 그 동안 우리들이 가장 무시해온 구절들이기도 하다. 십일조에 관한 신명기의 가르침은 가족의 축제와 공동체를 위한 나눔으로 정리된다. 즉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축제를 열어 먹고 마시고 즐겁게 놀며, 아울러 마을에 함께 사는 어렵고 외로운 이웃들의 삶을 돌아보고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십일조의 기능이며 바른 실천방법이다. 물론 이 때 돌아보아야 할 이웃에는 레위 자손들과 함께 떠돌이, 고아, 과부 등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십일조를 통한 축제와 나눔의 신명기적 정신은 어느덧 사라지고, 각자가 내 소득은 모두 내 것이라는 이기적인 마음과, 이웃의 소유까지도 빼앗아 내가 가지려는 탐욕만이 넘치게 되자 이들을 향해 말라기 선지자는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나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 천벌 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말 3:8-10 공동번역)

이러한 십일조에 관한 구약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오늘 우리들의 십일조에 관한 이해와 실천은 그 본래의 정신으로부터 심히 왜곡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십일조를 가져갔던 성전은 곧 오늘날 교회이고 십일조를 받는 대상인 레위인 또는 제사장들은 오늘날 목회자라고 하는 잘못된 등식이 우리들로 하여금 얼마나 형식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십일조 생활을 하게 만들었는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도 실제로 공동체 안에서 축제와 나눔의 실천이 없다면 과연 십일조는 누구를 위해서 왜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다는 의미는 진정 무엇인가?

신약에 오면 복음서의 예수 역시 무조건적으로 강요되는 헌금을 크게 책망한다. 마가복음 12장에서 가난한 과부가 동전 2개를 성전에서 헌금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녀가 가장 많이 헌금했다고 이야기한 후 그 큰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것을 예언한다. 가난한 과부의 생활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그녀의 생활비 전부까지도 받아내서 성전의 웅장함을 유지하기 위해 헌금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는 분노하는 것이다.

  즉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헌금을 내는 주체가 아니라 헌금의 사용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신명기적 정신 위에 예수는 서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조금만 부흥해도 너나없이 대형건물을 짓고 웅장함을 유지하려고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우리의 자리는 분명하지 않은가?

구약과 신약을 망라해서 오늘 같은 우리들의 십일조 생활을
지지하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성경적이라는 말이 단순히 성경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의 근본정신과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볼 때 우리의 십일조는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미신적이고 기복적이다.

 나아가 십일조가 공동체적인 구제와 복지를 위한 것으로 본다면 현대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세금으로 정부에 십일조 또는 그 이상을 내고, 목회자를 비롯한 교인 모두는 이 세금을 통해 정부에서 제공하는 복지혜택을 입고 있는 마당에, 공동체 전체를 위한 아무런 복지정책도 없는 교회에 또 다시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탐욕이다. 모든 현대국가는 크든 작든 세금을 통해 십일조의 정신을 살려가고 있음을 교회는 인정해야 한다.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헌금에 관련해서 꼭 다루어야 할 문제는, 그래도 교회를 유지하고 목회자의 생활을 위해 최대한의 헌금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선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직과 엄청난 유지보수비가 필요한 건물을 가진 교회는 그들 스스로가 감축의 뼈아픈 과정을 거쳐 예산절감을 이룸으로써 교인들에게 헌금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이다. 아울러 목회자 사례는 각 교회들이 총회에 공동 출연하는 기금으로 동등한 사례비를 미자립교회에 지원하고, 장기적으로는 총회마다 목회자 수급을 조절하여 필요 이상 공급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양산되는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할 뿐이다.

그렇다면 헌금은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내는 것이 바람직한가?

우선 헌금에 여러 종류와 이름을 붙이는 것은 헌금의 기본정신인 자원하는 마음에 비춰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

(1) 헌금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

(2) 우리의 삶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과 헌신의 상징,

(3) 그리고 교회의 운영과 다양한 활동에 필요한 재정분담을 위해 헌금을 드린다.

 

사람 사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서도 나는 감사의 말과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돈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다만 변하기 쉽고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담을 접시로 헌금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접시의 이름이나 크기는

전적으로 교인들 각자에게 맡기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들의 교회는 잘못된 마음으로라도 헌금을 많이 하도록 애쓰기 보다,
부담 없이 편한 마음으로 모이고, 사회의 복지시스템에서 소외된 이웃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축제와 나눔이 있는 신명기적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필자 / Old Toongabbie 호주연합교회 목사

 

출처 : http://www.koreanherald.com.au/bbs/board.php?bo_table=lee_column&wr_id=5&page=4

 

최야곱님의 멘트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바치든, 얼마를 바치든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꼭 예배당에 바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더 큰 문제입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거짓으로 가르쳐 놓고, 거기에서 목사는 레위인도 아니면서, 스스로 제사장을 자처하는 자들이(믿는 모든 자들이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받으려고 하니, 이것은 율법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고, 그림자의 그림자요, 사이비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yes24/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율법이라며 이단으로 정죄하는 자들이 십일조를 지키는 것은 복음이라고 강변하니 양의 탈을 쓴 삯꾼들의 누룩이 온 한국교회를 점령한 것이 사실입니다. 안식교가 이단이듯이 십일조 역시 복음을 훼손하는 이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