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직도 헌금을 하는가? |
우리는 십일조, 주정헌금, 월정헌금, 감사헌금, 건축헌금 등 다양한 제목으로 교회의 재정을 위해 헌금을 한다. 감사헌금의 경우 출생, 입학, 생일, 취직, 결혼, 주택구입 등의 제목으로 삶의 모든 순간마다 헌금을 드린다. 그 외에 1,000 일 동안 일정액을 매일 헌금하는 일천번제 헌금도 있고, 심지어 희망하는 수입을 정해서 미리 십일조를 내기도 한다.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각 헌금의 종류에 따른 명단을 주보에 발표해서 누가 무슨 헌금을 하는지 모든 교인들에게 알리고 금액을 밝히는 곳도 있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 교리공부와 함께 다양한 헌금생활에 대해 배우고,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끊임없이 강조된다. 교회에서 관리하는 헌금자료는 모든 직분 심사에서 빠짐없이 고려된다. (1)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오로지 헌금으로만 해야 하고, (2)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더 크게 물질의 복을 주시며, (3) 헌금액수가 바로 믿음의 분량이고, (4) 교회에서 헌금의 사용과 집행에 대한 잘못은 하나님께서 할 일이니 (5) 교인들은 열심히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 등이다. 십일조는 교인들이 복 받는 최고의 비결로 목회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가르쳐야 할 중심주제가 되었고, 반면에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행위로서 큰 재앙이 따른다고 동시에 가르친다. 십일조를 장려하기 위해 복 받은 증거로 수많은 신화들이 유포되는데 주로 미국과 한국의 여러 부유한 사업가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또한 십일조는 반드시 출석교회에 내야지 선교나 구제의 목적으로라도 다른 곳에 임의로 쓰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마음대로 하는 또 다른 죄가 된다고 설교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으로부터 수십 배의 보상이 약속된 최고의 투자가 되었고,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도 미리 선불로 내면서 십일조의 열 배의 수입을 기대하는 도박으로까지 변질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십일조는 한국교회의 복이 아니라 재앙이며, 예수의 복음이 더 이상 무당의 굿거리가 되지 않도록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청산대상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십일조를 레위 자손들에게 주라는 말씀은 민수기 18장에 들어있다. 어쨌든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확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들에게 주게 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분배 받고 농사를 짓게 된 후의 상황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십일조는 개인적인 감사와 헌신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신 원칙으로 바뀐다.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나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 천벌 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말 3:8-10 공동번역) 오늘 우리들의 십일조에 관한 이해와 실천은 그 본래의 정신으로부터 심히 왜곡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십일조를 가져갔던 성전은 곧 오늘날 교회이고 십일조를 받는 대상인 레위인 또는 제사장들은 오늘날 목회자라고 하는 잘못된 등식이 우리들로 하여금 얼마나 형식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십일조 생활을 하게 만들었는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도 실제로 공동체 안에서 축제와 나눔의 실천이 없다면 과연 십일조는 누구를 위해서 왜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다는 의미는 진정 무엇인가? 즉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헌금을 내는 주체가 아니라 헌금의 사용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신명기적 정신 위에 예수는 서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조금만 부흥해도 너나없이 대형건물을 짓고 웅장함을 유지하려고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우리의 자리는 분명하지 않은가? 나아가 십일조가 공동체적인 구제와 복지를 위한 것으로 본다면 현대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세금으로 정부에 십일조 또는 그 이상을 내고, 목회자를 비롯한 교인 모두는 이 세금을 통해 정부에서 제공하는 복지혜택을 입고 있는 마당에, 공동체 전체를 위한 아무런 복지정책도 없는 교회에 또 다시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 탐욕이다. 모든 현대국가는 크든 작든 세금을 통해 십일조의 정신을 살려가고 있음을 교회는 인정해야 한다. 우선 헌금에 여러 종류와 이름을 붙이는 것은 헌금의 기본정신인 자원하는 마음에 비춰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 (1) 헌금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 (2) 우리의 삶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과 헌신의 상징, (3) 그리고 교회의 운영과 다양한 활동에 필요한 재정분담을 위해 헌금을 드린다.
사람 사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서도 나는 감사의 말과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돈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다만 변하기 쉽고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담을 접시로 헌금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접시의 이름이나 크기는 전적으로 교인들 각자에게 맡기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완전한 축제와 나눔이 있는 신명기적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출처 : http://www.koreanherald.com.au/bbs/board.php?bo_table=lee_column&wr_id=5&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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