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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1 Jesus said, “This heaven will pass away, and the one above it will pass away. 2 The dead are not alive, and the living will not die. 3 In the days when you ate what is dead, you made it alive. When you come to dwell in the light, what will you do? 4 On the day when you were one you became two. But when you become two, what will you do?”
도마복음의 언어는 수수께끼! 특히 본 장의 언어는 해설자인 나로서는 적군들의 통신에서 채취한 암호를 풀어야만 하는 임무를 떠맡은 것과도 같은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단절된 컷과 컷들의 미장센과도 같은 이 장의 언어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실제로 4절로 구분된 이 장의 명제들은 제각기 독립적으로 성립된 파편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 제1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예수의 말씀들은 해석의 대상이었다. 해석을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그 구함을 그쳐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막상 그 해석의 실마리를 찾았을 때 우리는 고통스러울 뿐이다(도2). 그러나 고통스러울 때만이 우리는 경이를 만나게 된다.
“이 하늘도 사라지리라. 그리고 이 하늘 위에 있는 저 하늘도 사라지리라.” 하늘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물론 공관복음서에도 있다. 마가복음 13:31을 보라! (마 24:35, 눅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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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분명 “하늘이 사라진다”는 표현이 들어있다. 그뿐 아니라 “땅도 사라진다”고까지 말한다. “하늘과 땅”이 다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송유(宋儒)들도 천지는 없어져도 리(理)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퇴계의 리학(理學)적 사유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내 말”의 불변을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믿고 사는 이 하늘(This Heaven)도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은 중동문명권, 특히 페르시아문명권의 영향을 받은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지역의 공통된 우주론의 특징이지만 하늘이 층층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 영향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운운하는 불교적 세계관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고린도후서 12:2에서 사도 바울은 저 하늘 위의 하늘인 세 번째 하늘(the Third Heaven)에 끌려올라갔다 내려온 신비체험을 고백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신비체험을 떳떳하게 자랑하지 않는다.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도마는 인간들이 하늘에 쓸데없이 부여하는 의미를 일소시킨다. 이 하늘도 사라질 것이며, 이 하늘 위에 있는 저 하늘도 사라진다. 저 하늘에 천국이 있다고 한다면 인간보다 새가 더 먼저 도달할 것이다(도 3). 그것은 끊임없고 변하고 사라질 뿐인 공기의 집적체일 뿐이다.
“죽은 자들은 살아있지 아니 하다”라는 명제는 너무도 지당한 트루이즘(truism: 자명한 이치)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종의 무서운 칼날이 들어있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리라”는 식의 터무니없는 망상을 여지없이 깨어버린다. 죽은 자들은 살아있지 아니 하다. 죽은 자들은 살아날 수가 없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동시에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사르캐즘(sarcasm)이 들어있다. 살아있어도 죽은 자들과 같이 살아가는 인간들, 저 하늘이 고정불변의 하늘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하늘이라는 것도 모르고 매사에 고정적 의미만을 부여하는 인간들, 그 인간들은 죽어있는 자들이다. 이 죽어있는 자들은 살고 있지를 않은 것이다. 생명의 맥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한 것이다. “죽은 자들은 살아있지 아니 하다.” 죽은 것처럼 살고 있는 인간들은 실제로 살아있지 않은 것이다. 오직 끊임없이 말씀의 해석을 추구하는 자들, 정지되고 고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들만이 살아있는 것이다.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아니 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자들”이다. 이 살아있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아니 한다.
공자(孔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조그만 동네에도 나만큼 충신(忠信)한 자들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야장」27). 여기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호학(好學)이라는 단어의 번역이지만, 호학은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구함을 그치지 아니 한다”는 말과 대차가 없다. 호학은 단지 학문을 좋아한다는 일시적 사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쉴 새 없이 배움을 추구하는 과정적 사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움에 노출되어야 하며,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도마가 말하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간이다. 그러한 추구를 통해 고통과 좌절을 맛볼 줄 아는 인간, 그래서 천국의 경이를 맛볼 수 있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인간이며, 이 살아있는 인간들은 죽지 아니 한다.
여기 “죽지 아니 한다(will not die)”는 제1장의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will not taste the death)”라는 표현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단 “죽지 아니 하리라”의 주어는 “살아있는 자들”이다. 죽어있지 아니 하고 참으로 살아있는 자들만이 죽지 아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살아있는 자들”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나는 참으로 살아있는 자가 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제3절의 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