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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1 The followers said to Jesus, “We know that you are going to leave us. Who will be our leader?” 2 Jesus said to them, “Wherever you are, you are to go to James the Righteous, for whose sake heaven and earth came into being.”
“따르는 자들”(followers)은 “제자들”(disciples)로 번역될 수 있으나 우리말에 제자들이라는 것은 너무 제한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여기서는 “따르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선택하였다. 문맥에 따라 호환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여기 “당신이 우리를 떠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는 기존의 복음서 해석에 익숙한 사람들은 곧 예수의 죽음을 예견하는 어떤 종말론적 맥락에서 해석하려고 들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에는 그러한 종말론적 암시가 없다. 단지 예수가 그들 운동의 현재 지도자(leader)이지만 그러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 그러한 불안의 요소가 예수운동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는 현실적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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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도마복음의 전체적 맥락을 무시한 채 이 장만을 단장취의하여 인상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예수가 살아 생전에 이미 그의 동생이나 형일 수도 있는(크로쌍 주장) 야고보의 리더십을 인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AD 49(혹은 AD 50) 예루살렘 공의회를 소집한 사람은 베드로가 아닌 야고보였다(행 15:13).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리더십을 장악했고 그는 유대인 정통주의를 고집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바울과는 노선이 달랐다. 그러니까 바울의 선교는 주로 안티옥을 중심으로 야고보의 예루살렘 리더십과는 별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여튼 여기 도마복음에 야고보가 예수의 말로서 언급된 것은 예수 생전의 상황이라기보다는 예수 사후의 교단의 리더십 문제와 관련된 어떤 인식의 구조가 여기에 덮어씌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하버드 신학대학의 대 신학자 쾨스터(Helmut Koeste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마복음서 제12장과 제13장에 나타난 도마와 야고보의 대비는 도마복음서의 저자가 야고보의 권위에 대항하여 도마전통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화하려는 의도를 지닌 초기기독교 써클에 속한 사람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단지 교권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야고보의 리더십을 부정하지는 않는다”(『신약입문』Ⅱ, 152~3).
유세비우스(AD c.260~c.339)는 『교회사』에서 야고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우리 스승의 동생인 야고보는 사도들의 교회의 리더십을 장악했다. 우리 스승의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그는, 야고보라는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의로운 자 야고보라는 칭호로 불리었다. 같은 성모의 자궁 속에서부터 그는 성스러웠다. 그는 술과 강한 음료를 먹지 않았고 고기도 먹지 않았다. 그는 머리에 면도날을 대지 않았고, 기름을 머리에 붓는 일도 없었다. 그는 목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양털을 입지 않았고 린넨을 입었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는 홀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항상 무릎 꿇고 중생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기 때문에 그의 무릎은 낙타 가죽처럼 갈라 터졌다. 무릎 꿇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어디서나 발견되었다. 이러한 특출한 의로운 성격 때문에 그는 의로운 자로 불리었고, 또 오블리아스라고 불리었는데 희랍어로 사람과 의(義)의 보호자라는 뜻이다”(2. 23. 4-7).
유세비우스는 여기 도마복음에 쓰인 “의로운 자 야고보”라는 표현의 유래에 관해 상세히 보고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내가 없을 때는 너희들은 “의로운 자 야고보”에게 가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게만 볼 수 없다는 것이 쾨스터나 전문적 주석가들의 입장이다. 여기서는 결코 “의로운 자 야고보”를 높이는 긍정적 맥락에서만 언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다음 제13장에 나타나는 디두모 도마의 여타 제자들에 대한 우월성의 클레임은 이 장에서 야고보를 무조건 치켜세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누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오리이까?”라는 질문 자체가 근원적으로 지도자가 별다르게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도자를 요구하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자력으로 나의 말의 해석을 발견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여! 굳이 너희들이 지도자를 원한다면 의로운 자 야고보에게 갈지어다. 여기 야고보를 형용하는 “그를 위하여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는 말은 유대인 지혜문학에서 흔히 누구를 칭송할 때 쓰는 관용구적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결코 야고보를 칭송하는 맥락에서만 해석할 수 없다고 발란타시스(Richard Valantasis)는 말한다. 벌써 제11장에서 “이 하늘도 사라지리라”라고 말한 것은, 야고보를 위하여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는 표현 자체가 결국 그는 사라질 뿐인 범용한 존재라는 어떤 부정적 맥락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Heaven and earth have been problematized, even to the point that the sayings previous to this says that these heavens are to pass away. This contextual problematizing makes the statement both ironic and neg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