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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말하고 있는 인간은 항상 살아있는 인간이다. 이미 서장에서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로서 전제되었고, “살아있는 예수”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인간은 생명적 인간이다. 죽은 인간이 아니다. 생명적 인간은 모든 고정적 실체를 거부한다. 삶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을 삶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도마는 하늘을 고정적으로 파악하고, 그 하늘에 천국이라는 고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를 여지없이 분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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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n is new each day. (Fr.6)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그는 또 말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향유되는 이 질서정연한 우주(코스모스)는 하나의 신이나 하나의 사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다. 일정 양만큼 켜지고 일정 양만큼 꺼진다. (Fr.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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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은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여기서 도마복음 제7장의 메타포를 연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복되도다 사자여! 사람이 그대를 먹어 삼키기에 그대는 사람이 되는도다.” 사자는 내 몸속에 내재하는 욕정(欲情)이었다. 인간의 욕정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내가 나의 욕정을 온전히 제어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그것은 항상 나로부터 객화(客化)된다. 그 욕정(Id)은 나(Ego)에게 사자처럼 덮친다. 그 덮치는 사자에게 내가 삼킴을 당하면 나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 덮치는 사자를 내가 삼켜 먹으면, 나도 구원을 얻고 그 사자도 구원을 얻는다. 그 사자가 바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건강한 나의 일부로서 갱생의 길을 걷는 것이다. 덮치는 사자를 삼켜라!
“네가 죽은 것을 먹던 그 날에는 너는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라는 제3절의 메시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먹는 것도 대부분 죽은 것이다. 채소도 뿌리가 잘리는 순간 이미 죽은 것이고, 고기도 다 죽은 것을 먹는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잘 먹었을 때는 그것은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나의 몸, 즉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온전하게 살아있는 인간은 끊임없이 죽은 것을 먹으면서 그 죽음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인간이다. 식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생활에서도 욕망과 같은 파멸적 죽음의 요소를 삼킴으로써 그 죽음을 생명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끊임없이 살아있는 자들이야말로 “죽지 아니 하리라”고 제2절에서 말한 것이다.
그 다음에 “빛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라는 말이 갑자기 나온다. 왜 그럴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빛”은 항상 “어둠”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어둠은 죽음, 빛은 생명이다. 이것은 후대 요한복음의 기저를 이루는 생각이다. 요한복음이 도마복음보다는 훨씬 더 영지주의적이다. 도마는 그렇게 빛과 어둠의 이원성을 강하게 대비시키지 않는다.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살아있는 인간은 당연히 빛에 거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어둠의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그 사실에 대하여 대비적으로 “빛”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공갈이나 협박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빛을 보라! 어둠의 동굴 속에선 물론 빛 한 줄기만으로도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굴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세상에서 산다. 그때 빛이란 너무도 흔한 것이다. 영생을 얻으리라, 생명을 얻으리라는 것은 일종의 클리쉐(cliche:진부한 문구)에 불과하다. 도마의 문제의식은 “빛을 발견하리라” “빛을 얻으리라”가 아니다. “빛 속에 네가 일상적으로 거하게 되었을 때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정말 충격적인 말이다. 도마의 비판은 동일한 문명권의 한 사유체계인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만을 강조하고, 거기에 대한 반사적 효과로서 멸집(滅執)의 해탈을 운운하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기만이나 협박일 수도 있다. 해탈을 해서 무엇 하겠다는 거냐? 네가 열반을 얻었느냐? 열반해서 도대체 무엇 하겠다는 것이냐? 해탈의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탈한 인간으로서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라는 예수의 질문은 두 번 반복된다. 그 질문은 독자의 사적 공간을 파괴하고 독자의 실존 속으로 직입(直入)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생일, 일생이”(道生一, 一生二)를 말한다. 유대문학 전통에서 하나가 둘이 된다는 것은 자웅동체였던 아담의 갈빗대가 분열되어 이브가 된 것을 말한다(창 2:21~24). 하나였던 그 순간에 너는 둘이 되었다. 남녀가 구비된 현실적 인간으로 화한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저 하늘 아래,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또다시 묻는다: “둘이 되었을 때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인생의 과제는 오늘 여기 이 땅 위에서 네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궁극적인 어떤 구원·해탈·열반·천국의 실체화는 허망한 기만에 불과할 수가 있다. 궁극적인 어떤 실체가 인생의 목표라는 모든 생각을 도마는 여지없이 무산시켜 버리고 만다. 역사적 예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해 보고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