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84) 예수를 예수라 말하면 그것은 예수가 아니다 - 도마와 노자

YOROKOBI 2009. 7. 11. 18:33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84) 예수를 예수라 말하면 그것은 예수가 아니다

도마와 노자

 

| 제91호 | 20081207 입력

 

 

카디샤 계곡. 계곡 저 끝에 만년설이 휘덮인 레바논 산맥의 최고봉, 코르네트 아스 사우다(3090m)가 보인다. 그 만년설 밑에 지브란이 태어난 브샤레 마을이 있다. 계곡의 바위 절벽 곳곳에 마론파 수도승들의 석굴이 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을 연상시킨다.

 

제13장

1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나를 무엇엔가 비교해 보아라. 그리고 내가 무엇과 같은지 말해 보라.” 2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의로운 천사 같나이다.” 3 마태가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현명한 철학자 같나이다.” 4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스승님이시여! 제 입은 지금 당신이 무엇과 같은지 전혀 언표(言表)할 수 없나이다.” 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그대의 스승도 아니로라. 그대는 내가 보살펴 온,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광천샘으로부터 직접 많이 마셨기에 취하였도다.” 6 그리고 예수께서 도마만을 데리고 은밀한 곳으로 가시었다. 그리고 도마에게 세 마디 말씀을 전하였다. 7 도마가 그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에, 그들이 도마에게 물었다: “예수께서 너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뇨?” 8 도마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가 예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 중 하나만 너희에게 이야기해도, 너희들은 돌을 주워 나를 쳐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 손에 있는 그 돌로부터 불길이 솟아 너희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 담론이 종말론(Eschatology)과 기독론(Christology)을 전제로 한 기술이며 동시에 그러한 기독론의 틀 속에서 베드로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쓰여진 이야기라면 이 도마복음의 이야기는 전혀 그러한 기독론을 전제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메시아의 비밀”을 암시하는 종말론적 경고가 들어 있지 않다. 공관복음서의 담론은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됨을 구현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고, 그 예고가 더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예고를 받아들이는 자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아가야만 한다.

여기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가 무엇과 같은지” 진실로 생각하는 바를 말해 보라고 요구한다. 이에 베드로는 “의로운 천사”(a righteous angel) 같다고 말한다.

천사는 “메신저”(messenger)로도 번역된다.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의로운 천사와도 같다. 베드로는 역시 어떤 신적인 커넥션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현명한 철학자”(a wise philosopher) 같다고 말한다. 천사에 비하면 매우 땅적(earthly)이다. 세속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너무 헬레니즘의 토양에서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다. 예수는 실제로 당시의 갈릴리 민중에게는 견유학파의 철학자(a cynic charisma)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마태의 고백은 매우 현실적인 예수의 민중적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오직 침묵의 강물을 마실 때에야 비로소 참으로 노래하게 되리라. 그대들은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산을 오르기 시작하게 되리라. 대지가 그대들의 사지(四肢)를 삼킬 때에야 비로소 그대들은 참으로 춤추게 되리라.” 이것은 20세기에 가장 많이 애독된 책 중 하나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예언자』의 한 구절이다. 지브란의 외할아버지는 마론파 신부였다. 마론파는 4~5세기 초기기독교의 전통을 이은 특별한 종파로서 매우 자유롭고 순결한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레바논의 카디샤 계곡(The Qadisha Valley)에 모여 살았는데 매우 영성이 풍부하였다. 이들에게 도마복음이 나타내고 있는 순결한 예수교사상이 흘러들어 갔고 그러한 영성이 지브란의 정신세계의 바탕을 이루었다. 지브란이 태어난 카디샤 계곡의 브샤레를 찾아가는 나의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심오한 한 영적 체험으로 기록될 것 같다. 보이는 모든 것, 풀 한 포기조차 나에게 하나님의 소리를 전했다. 사진은 브샤레 지브란박물관 입구의 레바논산 절벽에 박힌 동상. 임진권 기자
이에 대하여 도마는 “스승님이시여! 제 입은 지금 당신이 무엇과 같은지 전혀 말로 표현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예수의 신적인 경지(divine realm)는 그것이 참으로 신적인 경지인 한에 있어서는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말이라는 개념적 틀 속에 한정될 수 없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을 펼치면 이런 말이 있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말하여진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

예수를 예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말하여진 예수는 참다운 예수가 아니다.

예수가 “누구라고” 규정하는 인간의 말들이 과연 살아있는 예수를 참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예수를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라는 말로 규정한다고 해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과연 무엇일까? 도마는 근원적인 규정성을 거부하는 의미에서는 인간 사유의 초극점을 달리고 있다. 나의 입은 도저히 당신이 누구라는 것을 말할 수 없나이다!

이에 예수는 말한다. 그대가 규정성을 거부한다면 옳다! 나는 그대의 스승도 아니로다. 하나의 스승(a Teacher)이라는 규정성조차도 사라져야 할 인간의 말일 뿐이로다. “그대는 취하였도다. 저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광천샘으로부터 직접 많이 마셨기에.” 이것은 저주 아닌 최고의 찬사이다. 같은 나그함마디 라이브러리에 속한 문헌인 『제8천과 제9천에 관한 담론』에는 이런 말이 있다:

“모든 권능을 초월하는 권능의 시작을 나는 발견했노라. 그것은 시작도 없다. 나는 생명으로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샘을 본다. 나는 마음이로다. 나는 보아왔노라! 인간의 언어는 이것을 드러낼 수 없나니라.”(NHLE 324-58).

생명의 샘물을 직접 들이켠 사람은 예수의 마음을 언표(言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장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예수가 제자들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제2부는 예수가 도마의 대답을 듣고 그에게 무엇인가를 비전(秘傳)하는 장면이다. 제3부는 예수는 사라지고, 도마와 다른 제자들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예수는 도마를 특별 취급하여 은밀한 장소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에게 비전의 세 마디를 전한다. 그 세 마디가 세 개의 단어였는지, 세 종류의 다른 메시지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메이어(Marvin Meyer)는 타 문헌에 비정하여 그 세 마디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노릇이다. 그 예수의 말조차 근원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는, 개념적 언사의 저편에 있다. 그것은 절대(絶對)다. 절대란 모든 대(對: 개념적 짝)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제2부는 내레이터의 내레이션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제3부에서 도마는 예수에게서 무엇을 들었는지를 궁금해하는 제자들을 향해 외친다: “내가 예수께 들은 말 중 한마디만 이야기해도 너희들은 나를 돌로 쳐죽이려 할 것이다.” “돌로 쳐죽인다”는 표현은 그 말의 내용이 이미 정통적 사유를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 돌에서 불길이 솟구쳐 너희들을 불살라버릴 것이다.

『바돌로매 복음서』 2:5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진리를 묻는 제자들을 향해 마리아가 말한다.

“나에게 이 신비에 관해 묻지 말라. 내가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면, 나의 입으로부터 불길이 솟아 이 세상을 다 불사르리라.” 언표될 수 없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단절을 상징하는 표현들이다.
출처 : (84) 예수를 예수라 말하면 그것은 예수가 아니다 - 도마와 노자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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