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85)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 기도와 구제

YOROKOBI 2009. 7. 11. 18:33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85)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기도와 구제

 

| 제92호 | 20081214 입력

 

 

지브란은 1883년 브샤레에서 태어났는데 1908년부터 파리의 미술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에서 3년 동안 미술공부를 했다. 이 시기에 유명한 조각가 로댕을 만났고, 로댕은 지브란의 위대한 미래를 예언했다. 지브란의 그림은 그의 시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 그림에서 알 수 있듯 바로 이 여인들이 헤매고 있는 초원과 뒷산의 배경이 브샤레의 영험스러운 산하이다. 무한한 해석의 여운을 남기는 신비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우리들 영혼의 자화상일 것이다. 레바논 브샤레 지브란박물관 제공

 

제14장

1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禁食)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自招)하리라. 2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定罪)되리라. 3 그리고 너희가 구제(救濟)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害惡)을 끼치리라. 4 너희가 어느 땅에 가든지, 한 시골동네를 거닐게 될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면, 그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그대로 먹으라,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病者)를 고쳐주어라. 5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1 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2 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3 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sprits. 4 When you go into any land and walk about in the countryside, when people take you in, eat what they serve you and heal the sick among them. 5 For what goes into your mouth will not defile you; rather, it is what comes out of your mouth that will defile you.”

지난주까지 소개된 제12·13장은 도마기독교에 대한 아폴로제틱한 성격이 개재되어 있어 상당히 후대적 삽입일 가능성이 있다는 문헌비평의 화살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제14장은 큐복음서나 공관복음서와 자료를 공유하는 것으로 매우 오리지널한 로기온자료로서 평가되는 것이다. AD 50년 이전에 성립한 파편으로 추정된다. 공관복음서와 비교해볼 적에 공관복음서에 선행하는 자료임이 확실하며 그 역방향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마태·마가·누가 자료로부터 도마 14장 자료가 짜깁기된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생생한 초기 모습을 전하는 오리지널한 자료라고 패터슨(Patterson)은 평가한다(The Gospel of Thomas and Jesus, 128~33).
처음부터 대뜸 “…한다면”이라는 “if”절의 예수 말씀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황할 수 있으나, 제6장의 질문이 선행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6장 1절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오리이까? 구제는 해야 하오리이까? 음식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여기 제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네 가지다: 1)금식(Fasting) 2)기도(Prayer) 3)구제(Alms) 4)음식금기(Diet).

과연 이 사진만을 통하여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산의 영험스러운 느낌이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지브란이 태어난 곳 브샤레의 바로 뒷동산, 레바논산맥의 최고봉인 코르네트 아스 사우다(3090m, 백두산보다 높다)를 바라보고 있는 내 영혼은 미세한 바람에 휩싸여 드높고 드넓은 창공으로 비상하고 있다. 저기 저 십자가를 보라! 만년설이 녹아 내리는 시냇물만 속삭이는, 저 인적의 자취조차 없는 설원 위에 솟아 있는 저 십자가를! 복작복작대는 인파와 소음 속의 강남 대형 교회 십자가와 한번 비교해보라! 영혼의 정화를 느낄 것인가? 수치를 느낄 것인가? 자만의 욕설을 쏟아낼 것이뇨? 기도란 무엇이뇨? 저 살아있는 창공에 그대 자신을 활짝 펴는 것이 아니라면! 저 창공에 그대의 어둠을 쏟아버려라. 그리고 그대 마음의 새벽을 맞이하여라! 그대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결코 그대들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지는 않는다. 그분 스스로 너의 가슴을 통해 말씀하실 뿐이다. 무수한 바다와 숲과 산의 저 기도를 들어보아라! 임진권 기자
이 문제는 마태복음(6:1~18)에도 매우 체계적으로, 도마의 주제와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잘 기술되어 있다. 마태복음 6:1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말한 예수 말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금식, 기도, 자선사업, 음식가림 등의 모든 제식적 행위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 행위(hypocritic act)라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위선(hypocrisy)을 증오한다. “…인 양” 체함을 저주한다. 체하다 보면 그것이 선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거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위선은 거짓이다. 모든 종교적 제식은 위선으로 흐르는 경향성이 있다. 제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기독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시대에는 기독교가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종교행위 내지 풍습에 관한 질문이었다. 도마복음 속의 예수는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 매우 공격적이며 역설적이며 신랄하다.

6장에서 이미 예수는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핵심을 찌르는 대답을 했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예수는 제자들의 내면의 심리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단식, 기도, 구제, 음식가림이 모두 귀찮고 괴롭고 힘든 것이다. 왜 그토록 귀찮고 괴롭고 힘든 일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러한 제식적 행위의 궁극적 소이연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기 위함”(Reward from your father who is in heaven)이다(마 6:1). 인간에게 상을 얻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 상을 얻는 것은 이러한 제식적 행위를 통할 필요가 없다.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제자들이란 제1장과 2장에서 언급한 대로,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이며,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않는, 끊임없이 구하는 자”들이다.

이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는 말한다: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자선(구제)하지 말라!”

그러나 예수는 “하지 말라”는 메시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본 장 제1절의 if절 앞에는 “금식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생략되어 있다.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리라!” 금식을 하지 말라는 권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함으로써 죄를 자초한다는 무서운 결과를 예고한다. 금식하면 배고프다. 배고프면 먹을 것만 생각한다. 라마단도 좋지만 라마단으로 인해 더 먹고 더 살이 찐다는 것이 문제다. 배고픈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금욕자에게 강간의 위험성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공자는 단지 이것만을 요구한다: “평소 많이 먹지 말라”(不多食). “육식의 기운이 곡기를 이기지 않도록 하라”(不使勝食氣. ‘향당’ 편).

소식(少食)은 금식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더 지속적인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권고는 매우 상식적이다. 어느 것이 더 하느님께 칭찬받을 행위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기도하지 말라.” 예수는 이러한 권고에서 그치지 않는다.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되리라!”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큰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 서서 중언부언하는 행위(마 6:5~7)가 이미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며, 과연 내가 기도를 바르게 했는가 하는 의식의 계기들은 정죄(condemnation)를 불러일으킨다. 기도는 내면의 소리일 뿐이며, 겉으로 언표해야 할 짓거리가 도무지 아닌 것이다. 예수는 외친다. 기도하지 말라! 기도는 너를 죄인으로 만들 뿐이다. 너에게 죄의식만을 불러일으킨다.

“구제하지 말라!” 예수는 이러한 권고에서 그치지 않는다. “구제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을 끼치리라!” 불교는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말한다. 보시는 오직 아상(我相)을 버린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보시를 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는 한 그것은 참다운 보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종교라는 이름하에 많은 자선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더 시급한 일은 자선사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모든 종교인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있는 자만 더 돈 잘 벌게 사회체제를 왜곡시키면서 있는 자의 자선사업을 찬양키만 하는 제도는 분명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이 아니다. 자선을 행하는 자가 자선이라는 의식에 매달려 사는 것은 결국 그 영혼에게 해악을 끼친다. 불순한 계기들로 인해 오히려 그 영혼의 순결이 오염될 수도 있다. 이것은 나 도올의 말이 아니요, 역사적 예수의 살아있는 목소리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출처 : (85)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 기도와 구제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