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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1 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2 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3 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sprits. 4 When you go into any land and walk about in the countryside, when people take you in, eat what they serve you and heal the sick among them. 5 For what goes into your mouth will not defile you; rather, it is what comes out of your mouth that will defile you.”
지난주까지 소개된 제12·13장은 도마기독교에 대한 아폴로제틱한 성격이 개재되어 있어 상당히 후대적 삽입일 가능성이 있다는 문헌비평의 화살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제14장은 큐복음서나 공관복음서와 자료를 공유하는 것으로 매우 오리지널한 로기온자료로서 평가되는 것이다. AD 50년 이전에 성립한 파편으로 추정된다. 공관복음서와 비교해볼 적에 공관복음서에 선행하는 자료임이 확실하며 그 역방향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마태·마가·누가 자료로부터 도마 14장 자료가 짜깁기된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생생한 초기 모습을 전하는 오리지널한 자료라고 패터슨(Patterson)은 평가한다(The Gospel of Thomas and Jesus, 128~33).
처음부터 대뜸 “…한다면”이라는 “if”절의 예수 말씀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황할 수 있으나, 제6장의 질문이 선행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6장 1절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오리이까? 구제는 해야 하오리이까? 음식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여기 제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네 가지다: 1)금식(Fasting) 2)기도(Prayer) 3)구제(Alms) 4)음식금기(D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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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에서 이미 예수는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핵심을 찌르는 대답을 했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예수는 제자들의 내면의 심리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단식, 기도, 구제, 음식가림이 모두 귀찮고 괴롭고 힘든 것이다. 왜 그토록 귀찮고 괴롭고 힘든 일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러한 제식적 행위의 궁극적 소이연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기 위함”(Reward from your father who is in heaven)이다(마 6:1). 인간에게 상을 얻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 상을 얻는 것은 이러한 제식적 행위를 통할 필요가 없다.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제자들이란 제1장과 2장에서 언급한 대로,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이며,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않는, 끊임없이 구하는 자”들이다.
이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는 말한다: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자선(구제)하지 말라!”
그러나 예수는 “하지 말라”는 메시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본 장 제1절의 if절 앞에는 “금식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생략되어 있다.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리라!” 금식을 하지 말라는 권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함으로써 죄를 자초한다는 무서운 결과를 예고한다. 금식하면 배고프다. 배고프면 먹을 것만 생각한다. 라마단도 좋지만 라마단으로 인해 더 먹고 더 살이 찐다는 것이 문제다. 배고픈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금욕자에게 강간의 위험성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공자는 단지 이것만을 요구한다: “평소 많이 먹지 말라”(不多食). “육식의 기운이 곡기를 이기지 않도록 하라”(不使勝食氣. ‘향당’ 편).
소식(少食)은 금식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더 지속적인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권고는 매우 상식적이다. 어느 것이 더 하느님께 칭찬받을 행위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기도하지 말라.” 예수는 이러한 권고에서 그치지 않는다.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되리라!”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큰 회당이나 거리 어귀에 서서 중언부언하는 행위(마 6:5~7)가 이미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며, 과연 내가 기도를 바르게 했는가 하는 의식의 계기들은 정죄(condemnation)를 불러일으킨다. 기도는 내면의 소리일 뿐이며, 겉으로 언표해야 할 짓거리가 도무지 아닌 것이다. 예수는 외친다. 기도하지 말라! 기도는 너를 죄인으로 만들 뿐이다. 너에게 죄의식만을 불러일으킨다.
“구제하지 말라!” 예수는 이러한 권고에서 그치지 않는다. “구제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을 끼치리라!” 불교는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를 말한다. 보시는 오직 아상(我相)을 버린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보시를 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는 한 그것은 참다운 보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종교라는 이름하에 많은 자선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더 시급한 일은 자선사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모든 종교인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있는 자만 더 돈 잘 벌게 사회체제를 왜곡시키면서 있는 자의 자선사업을 찬양키만 하는 제도는 분명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이 아니다. 자선을 행하는 자가 자선이라는 의식에 매달려 사는 것은 결국 그 영혼에게 해악을 끼친다. 불순한 계기들로 인해 오히려 그 영혼의 순결이 오염될 수도 있다. 이것은 나 도올의 말이 아니요, 역사적 예수의 살아있는 목소리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