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총검으로 동생 찌른 군인 추적해온 김무정씨
ㆍ“수소문해 찾아 냈지만 고엽제 후유증 앓는다니… 모두 몹쓸 놈의 세상 만난 탓”
“남을 미워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디다. 그런데도 그걸 붙들고 살았으니….”
5·18’ 당시 동생을 총검으로 찌른 군인을 30년간 추적해온 김무정씨(66·광주 북구 운암동)의 말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복수를 하고야말겠다고 마음속으로 칼을 갈아온 지난 세월이 이제 부질없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모두가 몹쓸 놈의 세상을 만나, 운이 없었던 것이제.”
김씨의 동생 형진씨의 운명이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1980년 5월23일 오후였다. 형진씨는 당시 나주 일대에서 염소와 닭을 사들여 광주에 내다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결혼을 약속한 여인도 있었기에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계엄군이 진주해 있는 불안한 광주를 떠나 고향 나주로 가기 위해 나주로 통하는 동부파출소(현 송정치안센터) 쪽으로 갔다. 마침 파출소 앞에는 계엄군 3명과 주민 10여명이 술 취해 쓰러진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때 소총을 멘 채 오토바이를 탄 문제의 신 상사가 나타났다. 신 상사는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어 개머리판으로 주민들을 마구 두들겨 팼다. 형진씨가 신 상사에게 “말로 하시라”며 제지하려 했다. 그러자 신 상사가 “총맛을 봐야 하는 놈”이라고 위협하며, 착검한 총을 들이댔다. 놀란 형진씨가 길 건너편 음식점으로 달아났다. 신 상사는 뒤쫓아가 형진씨의 가슴과 배 두 군데를 찔렀다. 형진씨는 온몸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도망쳤으나 신 상사는 이번에도 따라가며 등과 배를 찔렀다. 형진씨는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져 폐절제 등 대수술을 받았다.
며칠 후 신 상사는 김씨 직장으로 찾아와 “동생을 쏠 수도 있었는데, 많이 봐준 것이다. 검문검색에 응하지 않았으니, 치료가 끝나면 계엄사로 연행할 것”이라고 마치 큰 시혜를 베풀기나 한 듯 말을 했다. 화가 치민 김씨가 신 상사의 멱살을 잡고 한참을 나동그라졌다.
“저건 사람이 아니여.”
이때부터 그는 동생의 원수를 갚아주기로 결심했다. 그날 퇴근 후, 넷째 동생(당시 27세)과 그의 친구들을 불렀다. 김씨는 집에 돌아오면서 사온 대검을, 동생 등은 몽둥이를 든 채 신 상사가 세들어 사는 신촌리 마을로 달려갔다. 이 동네는 당시 군 교육기관 소속 군인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수소문 끝에 신 상사의 집을 찾아 덮쳤다. 그러나 건장한 청년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신 상사는 급히 광주 시내로 몸을 피해버렸다. 그후에도 계속 신 상사를 찾아다녔지만, 부대 안에 머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법에도 호소했다. 같은 해 6월 계엄사 등에 수차례 탄원서를 냈다. 마침내 두 달 후 신 상사가 중상해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징역형이 내려졌고 파면됐다. 그러나 신 상사는 5개월여 만에 석방됐다. ‘군인들의 세상’이어서 법질서는 온데간데 없었다.
언젠가는 끝장을 내리라. 하지만 고단한 생활 탓에 좀체 뜻을 이루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동생은 조선대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폐손상이 워낙 심해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83년 11월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에 아버지까지 울화병으로 돌아가시자, 도저히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다시 복수의 길로 나섰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뜻을 이루면 자살하기 위해 극약까지 마련했다. 신 상사는 충남 부여에 살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겨우 집을 찾아 3일간 기다렸으나 신 상사는 어디론가 몸을 피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명예퇴직한 98년 봄, 이번엔 대전으로 옮긴 신 상사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도면밀한 그는 눈치를 채고 달아났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던 그는 언제나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럴수록 그를 향한 적개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김씨는 올해 또 한 번 그를 찾아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신 상사가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폐지를 주워 팔아 불우이웃을 도우며 산다는 얘기를 듣고 맘을 돌렸다. 고엽제 후유증도 심하다고 했다.
30년 동안 쌓인 울분으로 김씨도 온 몸이 성치 않다. 질병이 많아 자신을 종합병원이라고 했다.
“총칼이 법이던 시대를 고단하게 살았습니다. 부모님도 한을 안고 모두 돌아가셨고, 집안도 그 일로 풍비박산이 나고….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있는데….”
ㆍ“수소문해 찾아 냈지만 고엽제 후유증 앓는다니… 모두 몹쓸 놈의 세상 만난 탓”
“남을 미워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디다. 그런데도 그걸 붙들고 살았으니….”
5·18’ 당시 동생을 총검으로 찌른 군인을 30년간 추적해온 김무정씨(66·광주 북구 운암동)의 말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복수를 하고야말겠다고 마음속으로 칼을 갈아온 지난 세월이 이제 부질없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모두가 몹쓸 놈의 세상을 만나, 운이 없었던 것이제.”
김씨의 동생 형진씨의 운명이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1980년 5월23일 오후였다. 형진씨는 당시 나주 일대에서 염소와 닭을 사들여 광주에 내다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결혼을 약속한 여인도 있었기에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계엄군이 진주해 있는 불안한 광주를 떠나 고향 나주로 가기 위해 나주로 통하는 동부파출소(현 송정치안센터) 쪽으로 갔다. 마침 파출소 앞에는 계엄군 3명과 주민 10여명이 술 취해 쓰러진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때 소총을 멘 채 오토바이를 탄 문제의 신 상사가 나타났다. 신 상사는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어 개머리판으로 주민들을 마구 두들겨 팼다. 형진씨가 신 상사에게 “말로 하시라”며 제지하려 했다. 그러자 신 상사가 “총맛을 봐야 하는 놈”이라고 위협하며, 착검한 총을 들이댔다. 놀란 형진씨가 길 건너편 음식점으로 달아났다. 신 상사는 뒤쫓아가 형진씨의 가슴과 배 두 군데를 찔렀다. 형진씨는 온몸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도망쳤으나 신 상사는 이번에도 따라가며 등과 배를 찔렀다. 형진씨는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져 폐절제 등 대수술을 받았다.
며칠 후 신 상사는 김씨 직장으로 찾아와 “동생을 쏠 수도 있었는데, 많이 봐준 것이다. 검문검색에 응하지 않았으니, 치료가 끝나면 계엄사로 연행할 것”이라고 마치 큰 시혜를 베풀기나 한 듯 말을 했다. 화가 치민 김씨가 신 상사의 멱살을 잡고 한참을 나동그라졌다.
“저건 사람이 아니여.”
이때부터 그는 동생의 원수를 갚아주기로 결심했다. 그날 퇴근 후, 넷째 동생(당시 27세)과 그의 친구들을 불렀다. 김씨는 집에 돌아오면서 사온 대검을, 동생 등은 몽둥이를 든 채 신 상사가 세들어 사는 신촌리 마을로 달려갔다. 이 동네는 당시 군 교육기관 소속 군인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수소문 끝에 신 상사의 집을 찾아 덮쳤다. 그러나 건장한 청년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신 상사는 급히 광주 시내로 몸을 피해버렸다. 그후에도 계속 신 상사를 찾아다녔지만, 부대 안에 머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법에도 호소했다. 같은 해 6월 계엄사 등에 수차례 탄원서를 냈다. 마침내 두 달 후 신 상사가 중상해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징역형이 내려졌고 파면됐다. 그러나 신 상사는 5개월여 만에 석방됐다. ‘군인들의 세상’이어서 법질서는 온데간데 없었다.
언젠가는 끝장을 내리라. 하지만 고단한 생활 탓에 좀체 뜻을 이루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동생은 조선대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폐손상이 워낙 심해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83년 11월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에 아버지까지 울화병으로 돌아가시자, 도저히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다시 복수의 길로 나섰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뜻을 이루면 자살하기 위해 극약까지 마련했다. 신 상사는 충남 부여에 살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겨우 집을 찾아 3일간 기다렸으나 신 상사는 어디론가 몸을 피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명예퇴직한 98년 봄, 이번엔 대전으로 옮긴 신 상사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도면밀한 그는 눈치를 채고 달아났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던 그는 언제나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럴수록 그를 향한 적개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김씨는 올해 또 한 번 그를 찾아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신 상사가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폐지를 주워 팔아 불우이웃을 도우며 산다는 얘기를 듣고 맘을 돌렸다. 고엽제 후유증도 심하다고 했다.
30년 동안 쌓인 울분으로 김씨도 온 몸이 성치 않다. 질병이 많아 자신을 종합병원이라고 했다.
“총칼이 법이던 시대를 고단하게 살았습니다. 부모님도 한을 안고 모두 돌아가셨고, 집안도 그 일로 풍비박산이 나고….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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