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

[광주항쟁 30년](2) 지워지지 않는 상흔 - 피해자의 아픔

YOROKOBI 2010. 5. 10. 22:14
ㆍ5월 18일 서른살 되는 김소형
ㆍ사흘 만에 아빠잃은 5·18둥이 “슬픈 생일이 또 오네요


“국군이 아빠를 쏘다니… 어릴적 무척 힘들었죠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나를 지켜주는 버팀목”


태어난 지 사흘 만에 계엄군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은 ‘5·18둥이’ 김소형씨가 10일 광주 그날의 현장인 금남로에서 5·18 영령들을 추모하는 사업에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광주 | 배명재 기자

광주에 사는 김소형씨(여)의 생년월일은 1980년 5월18일이다. 광주항쟁이 일어나던 바로 그날 전남도청 앞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나이는 5·18 기념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5·18 20주년이 되면 그의 나이도 스무살이 되고, 30주년이 되면 서른이 된다.

이런 ‘5·18둥이’는 사실 소형씨 외에도 여럿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형씨에게 5·18은 남다른 비운이 서려 있는 날이다. 자신의 생일이면서 사실상 아버지를 잃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5·18 항쟁기간 중, 정확히 그의 생후 사흘째 되던 날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아버지 김재평씨(당시 29세)는 당시 전남 완도 수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11시11분 기다리던 딸이 태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기쁨에 들떠 한밤중인데도 곧바로 광주로 출발했다.

하지만 광주로 가는 길은 계엄군이 차단하고 있었다. 차를 얻어탈 수 있으면 타고, 아니면 두 발로 걸어서 광주 근처까지 왔고, 여기서 다시 외곽으로 돌아돌아 간신히 시내에 들어갔다. 광주 서구 화정동에 있는 그의 작은아버지 집에서 산모와 아기를 만날 수 있었다. 완도를 떠난 지 이틀 만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1일 오후 해질녘이 되자 계엄군의 총기 난사가 시작됐다. 갓난아기는 울음을 터뜨렸고, 아버지는 솜이불로 창문을 막으려고 일어섰다. 그 순간 “쩡그렁”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을 뚫고 날아든 총탄이 아버지를 쓰러뜨렸다.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된 20일부터 아버지는 도청 앞 집회에 나갔습니다. 엄마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아버지는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면서 나가곤 했다고 합니다.”

소형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처음 안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광주보상법’이 처음으로 만들어지면서, 보상 관련 서류를 챙기던 어머니가 그날의 비극을 털어놨다. 그때까지는 완도 보길도에서 함께 살던 외할아버지로부터 “아빠가 좋은 일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어린 나이에도 국군이 아빠를 쏘았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아빠랑 엄마랑 행복하게 잘 살았을 텐데요….”

그는 자신을 ‘나쁜 아이’로 규정했다. 말수도 적어졌고, 스스로 외톨이가 됐다. 혼자 책만 읽고, 그림을 쉼없이 그리는 버릇이 생겼다. 중학교 3학년 때 ‘5·18 전국학생 글쓰기 한마당’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써내 대상을 받았다. 조선대 미대에 입학한 후부터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조각을 전공했다. ‘5·18’을 소재로 작품을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았으나 “‘5·18’을 이용한다”는 말이 듣기 싫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상(像)’ 제작을 몇 번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눈물이 울컥 쏟아져 포기했다.

그는 요즘 꿈속에서 아버지를 자주 만난다. 그럴 때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두었다는 기분이 들어 기쁘다고 한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나에게 아버지는 황소가 몸을 비비면서 시원함을 얻어가는 언덕배기나 거친 세상에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밀어주는 버팀목 같은 존재입니다.”

지금 소형씨는 옛 전남도청 인근 웨딩숍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다. ‘5월 활동’도 주요 일과 가운데 하나다. 4년 전 구성된 ‘5월 청년부’가 무대다. 소형씨처럼 5·18 때 아버지를 잃은 남녀 4명과 5·18에 관심있는 젊은이 등 4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매달 18일 만나 토론회나 봉사활동을 하고 추석·설날에는 차례도 함께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