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

[광주항쟁 30년]하루하루가 충격·갈등… 희생자 절규 귓가 쟁쟁

YOROKOBI 2010. 5. 10. 22:13
ㆍ‘진압군 최초 양심고백’ 이경남 목사

경기도 평택 효덕교회의 이경남 목사(54)는 진압군 병사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양심고백을 한 사람이다. 1980년 5월 특전사령부 제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일병으로 광주에 투입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훗날 글로 남긴 것이다. 1999년 ‘당대비평’ 겨울호에 실린 ‘5월의 회고 - 어느 특전병사의 기록’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광주에서의 하루하루는 그에게 충격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캐리바50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보면서 충격에 빠졌고, 부상당한 시민을 들쳐업고 피신시키다 상급자로부터 “네가 아군이냐, 적군이냐. 또 그러면 너부터 죽이겠다”는 위협을 들으면서 갈등을 겪었다. 그가 현장을 떠난 것은 공수부대와 광주보병학교 간의 오인사격으로 시작된 교전에서 뒤통수에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되면서였다. 광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취재진과 마주한 이 목사는 “지금도 5월이 되면 광주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며 “그들의 절규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양심고백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광주 회고를 쓴 계기는.

“광주가 베일에 가려져 있던 때 사람들은 저마다 주워들은 얘기들로 한 마디씩 했다. 난 20여년 가까이 그럴 수 없었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잔혹한 국가폭력에 동원돼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사람으로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시는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왜 쏘라고 했고, 왜 쫓아가야 했는지 어디 물어볼 데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88년 국회 청문회 등을 통해 구체적인 물증이 나오면서 광주의 전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쯤 지나면서 5공 세력이 다시 준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 그냥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기억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압군인들의 정서는 당시 어떠했나.

“10·26 이후 군에는 전쟁경계령인 데프콘Ⅲ가 발령됐다. 군인들은 불안 그 자체였다. 잠 잘 때도 전투복을 입고 전투화를 신은 채 자야 했다. 80년초 사회혼란상이 계속되자 군에서는 폭도, 불순분자들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식의 교육을 했다. 진압에 임하는 군인들에게는 혼란 종식이 애국이요,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라는 식의 가치관이 주입됐다. 정신무장을 시킨 것이다. 신군부가 실권을 잡은 뒤 공수부대에는 주요 관공서와 대학 캠퍼스 도면을 파악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래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는데 우리 대대가 맡았던 경희대 캠퍼스의 경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다. 신군부 입장에선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79년 10월 부마항쟁 때 3공수여단이 투입되면서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든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니까 찍 소리 못하더라’는 생각이 군의 상·하층부 모두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완전진압’이라는 명령은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나.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 그런 잔재가 남아있지 않나. 대학에서도 후배들 ‘빠따’친다는 얘기가 아직도 나온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우리 군은 지금도 일제시대의 식민교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체주의적 국가관에 찌들어 있다. 파시즘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구조 속에서 양심을 지킨 사람들만 괴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