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

예언자들

YOROKOBI 2007. 6. 3. 23:21
 

 

 

 

1. 들어가는 말

나는 1987년 그러니까 17년전 「예언자」책을 발견했다. 그야말로 그것은 발견이었다. 나는 단숨에 이 책을 읽었고 그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여러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볼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 이 책을 구할 일이 있어서 이 책을 찾았으나 절판이 된 상태였다. 매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책이 대를 잊지 못하고 절판이 되다니. 피상성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별것도 아닌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과연 이 세상 사람들이 더구나 크리스챤들이 무엇을 찾는가 하는 생각에 우울하고 한심해 질 때가 있다.

얼마 전 나는 일반서점에서 「예언자들」이란 책을 보았다. 처음에는 이런 류의 책들이 많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은이와 목차를 보았다. 아, 아브라함 헤셀이 쓴 「예언자들」이 아닌가. 아니 어떻게 이 책이 일반출판사에서 나오다니. 요사이 기독교적 책자들이 일반서점에 나오는 것은 보기 어렵다. 공자니, 노자니, 괴테니, 칸트니, 플라톤이니, 시인들이니, 평전들, 경영에 관한 책들이 많이 눈에 뜨이는 출판계에 성경을 일반적으로 소개하는 책도 아니고 잘 보지도 않는 「예언자들」이 두툼한 몸무게를 버티면서 한 자리를 차지하다니 정말 큰 기쁨이었다. 한 권의 책,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이 책은 아닌게 아니라 저자 자신이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크게 바뀌었다. 저자가 감동받고 변화되었다면 얼마나 좋은 책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이현주 목사님은 옮기는 말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희열이 있어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역자로서 작업하는데 스스로 흥분하고 감동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저자의 깊은 사색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


2. 헤셀의 생애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하나님의 보물 상자에서 나온 보석이었다. 그는 1907년에 태어나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는 우아한 행동과 숭고한 사상으로 이루어진 교향악이었다. 말과 행동으로 그는 어제의 지혜를 오늘의 곤경에 연결시키는 작업을 훌륭하게 이루어 나갔다.

1960년대 중반, “신 죽음의 신학”이 한참 기세등등할 때, 헤셀은 그것을 변덕스러운 “유행”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인간성은 죽을 수 있고 인간의 양심은 무감각한 화석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 계신다고 헤셀은 말했다.

1965년, 여러 군데에서 오는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셀은 날카롭고도 용감하게 베트남 전쟁을 “도덕적인 유린”이라고 비난하였고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면서 베트남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부추겼다. 마틴 루터 킹이 실제로 반전 운동에 가담하게 된 데는 헤셀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1960년대부터 그가 죽은 1972년까지 헤셀은 당시의 사회적 문제에 폭넓게 참여했다. 나아가서 헤셀은 젊은이 문제, 노인, 의료 윤리, 종교 교육 등의 문제에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그런데 무엇이 헤셀의 초점을 이토록 급진적으로 바뀌게 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사유의 영역에서 행동의 일선으로 옮기게 했던가? 그가 자기를 알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변하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셀은 언젠가 TV 인터뷰에서 자신에 관하여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내 이야기를 좀 할까요? 나는 예언자들에 관한 책을 썼읍니다. 약간 큰 책이었지요. 몇 년이 걸렸읍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 책이 나를 변화시켰읍니다. 왜냐하면 내 생애의 초창기에 내가 지극히 사랑한 것은 다만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나는 그저 연구와 도서, 집필 그리고 사색 속에서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예언자들한테서 사람들의 일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건들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과의 대화” NY, NBC, 1973. p. 6.)

3. 예언자란 도대체 누구인가?


「예언자들」은 매우 논리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한 흔적이 분명하며 수많은 성경구절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이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서도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하박국에 대한 배경과 그들의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2부에서도 예언자의 신학과 예언자는 어떤 자들이며 그들의 외침과 기원들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한다.


헤셀은 1부에서 각 예언자들을 소개하기 전에 예언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서론적으로 다룬다. 예언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거창한 형이상학의 논술에서 예언자들의 예언으로 시선을 바꿔 본 철학도라면 장엄한 세계로부터 자질구레한 일상사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예언자들은 저잣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파묻힌다. 그들은 하찮은 일들로 법석을 떨고 시시한 문제로 극단적인 일을 낭비한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에게 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서 그게 뭐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예언자는 철저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에 무거운 짐을 지워주셨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인간의 무모한 탐욕에 망연자실해 있다. 하나님은 예언자의 말을 통해 분노하신다. 예언자는 역사의 구체적 현실에 골몰해있다. 예언자들에게 따르면 하나님은 선과 악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그 어느 것도 작게 보거나 지나처 버리지 않는다.

예언자들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삶이다. 예언자의 입은 날카로운 칼이다. 그는 하나님의 화살통에 꽂아두신 날카로운 화살이다. (사 49:2) 예언자들의 글을 읽으면 감성이 팽창하게 고조되고 느긋하게 안정을 즐기던 양심이 마구 뒤틀린다.

예언자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의 귀에 한 옥타브 높은 음계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노래하는 천사도 아니고 도리를 가르치는 성자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습격하는 자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외톨이가 되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가 감당할 것이란 그 자신에게는 쓰고 남에게는 불쾌한 것이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미친 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오늘날의 몇몇 학자들에게는 비정상인라고 불린다.

예언자들의 사상이 지니는 중요한 특색은 하나님의 역사 참여를 최우선에 두었다. 예언자들의 마음은 온통 역사라는 현장에 가 있다. 사회에 대한 책임, 그 역사의 순간이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한 민감한 인식이 그들을 움직였다.

고대 세계에는 왕들에 의한 인간의 잔혹함에 항의하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어찌 감히 누가 왕에게, 권력자들에게 대들 수 있는가. 사람들은 왕들이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였다. 왕의 말씀은 옳고 신의 말씀과 같이 변경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생각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히타이트, 일본의 신도, 로마 등에서 빈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인간의 행실이나 힘을 숭배하는 것을 분명하게 거부하였다. 그들은 왕의 건방진 행동과 업신여기는 태도(사 10:12)를 비난했고 심지어 저주했다. 이러한 역사는 고대 역사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하고도 놀라운 현상이다. ‘예언자들은 권력을 결코 우상화하지 않았다.’

왕은 신의 화신도, 대리인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한테 임명받아 하나님 말과 율법에 따라 다스리는 통치자이다. 사회질서의 핵은 왕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다. ‘무엇이 이스라엘 왕으로 하여금 독재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는가. 대답은 왕권과 예언과 제사장을 분리시키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 종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군주제도가 시작되면서부터 예언자들은 틈만 있으면 언제든지 왕의 실책을 책망하거나 아예 왕을 거부했다. 예언자는 왕에게, 왕은 통치권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 왕의 법 위에 하나님의 법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예언자 나단은 다윗 왕의 면전에서 그가 우리아에게 지은 범죄를 책망할 수 있었다(삼하 12:1-13).

예언자들은 아합 왕의 반대를 이끌었고 왕실이 뒤를 밀어주는 바알 숭배와 투쟁했다.(왕상 20:13-35)


4. 그리스적 사유와 유대적 사유의 차이

헤셀을 예언자를 논하면서 특히 그리스적 사유와 유대적 사고의 차이에 깊이 관심을 갖는다.

그리스인들은 언제나 신들을 영원불멸한 존재는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에피큐로스는 신들이 인간사에 관심을 둔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전개한 신론에서 신은 움직이지 않는 동인이며, 영원하고 온전히 활동적이며, 불변․부동하고 스스로 충족되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존재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는 세계와 초월자의 관계가 하나님이 세계에 참여하는 것으로 들어난다. 세상과 맺은 그분의 관계는 자기 충족이 아닌 관심과 참여로 드러난다.

성경의 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필요하다. 그리스적 사유형태에서는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리스 사상 밑바닥에는 모든 신들 위에 비인격적인 모습을 한 운명이 있다는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인에게는 운명이 궁극적인 이데아요 신비였다. 운명의 신비스런 힘은 무섭기만 하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의 주도성이다. 인간은 그의 파멸을 미리 예정한 무서운 힘의 희생자로 묘사한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인간이 예정된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니 기도하지 말라”고 한다.

성경의 저자들이 이 신기한 미신에 영향받지 않았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오히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열정이 운명을 믿는 신앙 또는 불가해한 필연이 인간사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모든 결단은 잠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인간이 살면서 행하는 행위에 따라 바뀌기도 하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열정은 운명을 점유한다. 인간은 그분에게로 돌아가라는 요청을 받고있으며 돌아감으로써 이미 판결된 내용이 바뀔 수도 있다.

그리스의 종교에서 신들은 인간의 친구들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스의 저술가들은 신들의 복수심, 적의를 끊임없이 비난한다. 호메로스의 시, 헤시오도스의 작품, 격언시들에 반영되어 있는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적 종교의 신들은 모두 힘이 있고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또한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들의 신은 변덕스럽고 죽음을 넘어설 희망이 없다.

신들의 질투에 대한 관념은 그리스 사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신들이 인간에게 적당한 이유도 없이 재난을 내리고 자기네들끼리 높은 자리와 특권을 두고 심지어 다른 신들에 바친 재물을 보고는 악의로 품기도 한다.

이에 반하여 성경은 그리스 비극처럼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상극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까닭없이 조리에 닿지 않는 질투를 하지 않는다.




5. 하나님의 열정


헤셀이 「예언자들」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열정’(pathos)이다. 하나님을 이 세상의 방관자가 아닌 동참자로 인식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머리 속에 있는 한 관념이 아닌 관심으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열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며 감정이 없는 하나님이란 아무래도 낯선 생각이다. 인간의 감정생활에 대한 그리스적 이해가 히브리적 사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된다. 성경에는 감정에 대한 경멸도 냉담에 대한 찬양도 없다. 예언서를 읽다보면 우리는 그들의 열정과 활기에 넘친 상상에 감동을 받게된다. 예언자들은 어떤 생각을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상상력으로 말을 토하는 것이다. 스토아파 성인에게는 냉정이 이상적 상태다. 예언자에게는 동정(sympathy)이 이상적인 상태다.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신은 영원하고 움직여지지 않으며 무감각하고 불변하는 실체라고 설명한다.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은 거역못할 실재였고, 당황하여 쩔쩔매게 하는 임재였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먼거리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사에 긴밀하게 반응하신다는 생각 그분은 단순히 지성과 의지만 지니신게 아니라 열정도 지니신 분이라는 생각이 바로 예언자들의 특유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그리스의 아낭케와 비슷하다.

그는 인간에게 열정 갖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다. 하나님의 열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관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과 당신의 백성과의 대화에 진정한 바탕이 된다. 예언자의 예언자됨은 미래를 내다보는데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열정을 꿰뚫어보는데 있다. 헤셀의 또 다른 책 「사람을 찾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정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6. 나가는 말

이 책은 아름답다. 문장이 아름답고 내용이 아름답다. 이 책을 손에 든 이는 그의 아름다운 문장과 심오한 내용에 어느새 깊게 빠지게 된다. 이 책은 철학적이다. 깊은 사색과 검증을 통하여 자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이 책은 신학적이다. 헤셀은 이 책에서 인간보다 하나님 문제를 고민한다. 아니 인간과 역사에 대하여 고민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이 책은 뜨겁다. 가볍게 볼 수 없다. 읽는 이로 하여금 그의 심장을 뛰게 한다. 뜨겁게 한다.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박철수 목사는 연세대 건축과와 총신대 신대원, 「돈의 의미」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았다. 「복음과 상황」편집 위원장, 기독교 학문연구소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고, 한동대학교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분당두레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축복의 혁명」, 「파스칼, 생각하는 갈대」, 「이 성전을 헐라」, 「이렇게 기도하라」등이 있다.